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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by 에릭 와이너독서 2022. 7. 4. 22:24
- 영어의 '철학자'라는 단어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 '필로소포스'에서 왔다. (중략)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 역시 지혜를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은 것,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도 사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다. (8쪽)
- 철학은 지식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무엇을'이나 '왜'가 아니라 '어떻게 '이다. (12쪽)
-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모든 질문을 두 부류, 즉 '존재'와 '당위'로 나누었다. '존재'를 다룬 사실이 늘 도덕과 관련된 '당위'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회삿돈을 횡령하면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횡령을 안하는 것이 '마땅한 의무'다. 흄은 꼭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명제에서 윤리 명제로 넘어가선 안된다. (26쪽)
- 마르쿠스는 스스로에게 생각을 그만두고 행동에 나서라고 누차 촉구한다. 좋은 사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관둬라. 좋은 사람이 되어라. 철학과 철학을 논하는 것의 차이는 와인을 마시는 것과 와인을 논하는 것의 차이와 같다. (32쪽)
-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최악의 무지는 지식의 가면을 쓴 무지였다. 편협하고 수상쩍은 지식보다는 폭넓고 솔직한 무지가 더 나았다. (48쪽)
- 소크라테스는 '어떻게'라는 질문에 관심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지? 어떻게 하면 정의를 실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알 수 있지? (49쪽)
- 삶을 성찰하려면 거리를 둬야 한다. 자기 자신을 더 명확하게 들여다보려면 자신에게서 몇 발짝 물라나야 한다. 이렇게 거리를 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과 대화는 사실상 동의어였다. (51쪽)
- 무엇보다 루소는 산책자였다. 그는 자주 걸었고, 혼자서 걸었다. 물론 걷기 모임에서처럼 가까운 친구와 걷는 데에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다. 우리는 혼자서, 자기 자신을 위해 걷는 자유는 걷기의 본질이다. 내가 원할 때 마음대로 떠나고 돌아올 자유, 이리저리 거닐 자유, '변덕이 이끄는 대로 이 길 저 길을 따라갈' 자유. (83쪽)
- 루소는 우리가 인간 본성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많은 것이 사실은 사회적 관습이라고 믿는다. (중략) 루소는 우리가 그 실체를 알아보기만 한다면 사회적 관습을 바꿀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한다. (90쪽)
-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92쪽)
- 상상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이런식으로 바라보면 삶은 더 이상 실패한 서사나 망쳐버린 결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진실이 아니다. 결말 같은 건 없다. 무한한 시작의 사슬만 있을 뿐. (99쪽)
- 감각과 관련해서 철학자들은 보통 두 파로 나뉜다. 먼저 이성주의 학파는 감각을 불신한다. 오로지 우리의 지력과, 그 지력이 가진 타고난 지식만이 동굴 안에 있는 우리를 빛으로 이끌 수 있다. (중략) 또다른 학파인 경험주의는 감각을 신뢰할 수 있으며, 오로지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만 이 세상을 알수 있다고 믿는다. (119쪽)
- 보는 것은 주관적이다. (중략) 무언가가 진정으로 목격되려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누구에게 바라봐져야만 한다. 소로는 이렇게 적었다. "관찰이 흥미로워지려면, 즉 중요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주관적이어야 한다." (121쪽)
- 소로가 내게 말한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143쪽)
-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중략)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이 이 세상을 지어낸 저자라는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저마다 자기 정신에서 현실을 구성한다는 의미다. (중략) 쇼펜하우어는 관념론자였다. 철학적 의미에서 관념론자는 이상이 높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관념론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세계 자체가 아니라 정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믿는 사람을 뜻한다. 물리적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 할 때에만 존재한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154쪽)
- "가장 최근에 쓰인 것이 늘 더 정확하다는 생각, 나중에 쓰인 것이 전에 쓰인 것보다 더 개선된 것이라는 생각, 모든 변화는 곧 진보라는 생각보다 더 큰 오산은 없다." (178쪽)
- 책만 열면 바로 해답이 있는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쇼펜하우어는 대답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해서 해답을 내놓는 것이 100배는 더 가치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너무 자주 책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했다. "책은 자기 생각이 고갈되었을 때만 읽어야 한다." (179쪽)
- 에피쿠로스는 정치적 유대가 자족의 가능성을 낮춰 결국 행복을 외부에 위탁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에피쿠로스의 모토는 라테 비오사스, 즉 '숨어서 사는 삶'이었다. (193쪽)
- 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긍정 정서의 차원에서 쾌락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다. (197쪽)
- 깊이 몰입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에는 몰입할 자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음악가는 없고 오로지 음악만 존재한다. 무용수는 없고, 오로지 무용만 존재한다. (223쪽)
- 베유는 관심을 어떤 수단이나 기법으로 보지 않았다. 베유에게 관심은 용기나 정의와 다르지 않은, 똑같이 사심 없는 동기가 요구되는 미덕이었다. (227쪽)
-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향하는 대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문제인 것은 그 주체, 즉 '나'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환상이다. 헤로인 중독자는 헤로인을 갈망하지 않는다. 헤로인을 하는 경험,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헤로인을 못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의 자유, 즉 아타락시아다. (252쪽)
- 눈앞에 펼쳐지는 끔찍한 장면을 지켜보면서 밀러는 상반된 감정과 씨름했다. "서구식 사고로는 비폭력 개념을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곤봉을 내리치는 경찰에게만큼이나 저항하지 않고 곤봉 세례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혐오라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286쪽)
- 인을 실천하는 사람은 공경과 아량, 신의, 민첩함, 친절이라는 다섯 가지 기본 덕목을 항상 실천한다. 물론 공자가 친절을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공자는 친절을 개인이 원할 때 베푸는 것에서 철학의 핵심 개념이자 훌륭한 통지의 근간으로 한 단계 승격시켰다. (311쪽)
- 공자가 격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다. 이 이유는 인과 친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친절은 자유롭게 흘러다니는 것이 아니다. 친절은 담길 그릇이 필요하다. 공자에게는 그 그릇이 올바른 의례적 행위인 예다. 이런 예의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고 공자는 말한다. 그래도 마치 예의를 신경 쓰는 것처럼 자리를 정리하라. 마치 예의가 중요한 것처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식사를 하라. 이런 의례가 따분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친절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 토대에서 나온다. (313쪽)
- 효는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우리가 헬스장에 가는 것이 땀을 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인 것 처럼, 효를 실천하는 것은 (오직) 효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절이라는 근육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다. (314쪽)
-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고, 자기계발서들은 조언한다. 이런 접근법은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목적지를 파악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니 움직일 것. 지금 있는 곳에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할 것. 일단 붓을 들고 이 붓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볼 것. (337쪽)
- 니체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자기 삶의 시인이 되고 싶어 한다. 가장 사소하고,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365쪽)
- 니체의 철학은 멋들어지게 춤을 춘다. (중략) 춤에 아무런 목표가 없듯이 (춤 자체가 목적이다) 니체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니체가 보기에 춤추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 목표를 향한다. 바로 삶의 찬미다. 니체는 그 무엇도 입증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독자가 세상을 바라보기를, 자기 힘으로, 전과는 다르게 바라보기를 원할 뿐이다. (377쪽)
-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렸고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403쪽)
- 삶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충동, 욕망, 혐오감, 즉 우리의 정신적 감정적 삶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헤라클레스의 기운과 슈퍼히어로의 파워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내면세계만을 제어할 수 있다. 내면세계를 지배하라, 그러면 "천하무적"이 될 것이라고, 스토아철학은 말한다. (408쪽)
- 감정이 드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중략) "우리는 보통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나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 것이어야 할 성취를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듯 우리 감정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감정은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결과이며, 이 판단은 틀린 경우가 많다. 우리가 잘못 이해했거나 갈피를 못잡는다는 뜻이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그런 판단이 말그대로 실제 경험과 다르다고 말한다. (410쪽)
- 실존주의자들에게 사람은 곧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더 이상의 반박은 없다. 우리는 온전히 실현한 기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추상적인 개념의 사랑이란 없으며, 오로지 사랑하는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천재란 없고, 천재적인 행동만이 있다. (중략) 더 이상 스스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말 것. 스스로를 그려나가기 시작할 것. (445쪽)
- 우리는 사회적 역할과 자신의 본지릉르 혼동한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타인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타인의 시선대로 스스로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진정성이 없다. (458쪽)
- 나이가 들면 특이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생각에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다른 사람들은 내 생각을 안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465쪽)
- 몽테뉴는 말 그대로 회의론자였다. (중략) 몽테뉴는 확신하기 위해 의심했다. (중략) 몽테뉴는 인간은 절대로 절대적 진실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잠정적이고 임시적인 진실을 붙잡는 것이다. 진실의 조각들. 이 진실의 조각들은 고정불변하지 않고 유동적이다. (487쪽)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어크로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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